한때 '집값 상승'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서울 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이 지금은 전례 없는 복합 위기를 맞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로 인한 이주비 조달 어려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원자재 가격 급등이 촉발한 공사비 30~40% 폭등, 건설사들의 선별적 수주 기조, 그리고 조합 내부의 오랜 갈등까지 — 사업성이 좋다고 알려진 단지마저 착공을 미루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결과 서울 도심 곳곳에서 멀쩡히 관리처분 인가를 받아 놓고도 첫 삽을 못 뜨는 구역이 속출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서울시가 2026년 들어 강수를 뒀다. 3년간(2026~2028년) 조기 착공이 가능한 85개 구역의 명단과 착공 일정을 공개하고, 총 8만5천 가구에 달하는 신규 공급을 예고한 것이다. 동시에 이주비 융자 지원 사업을 확대하고 정비사업 통합심의위원회 개최를 늘려 인허가 속도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물량 공세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표하고 있다.
왜 지금 '통합재건축'인가
이 같은 상황에서 정비업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부상한 것이 바로 통합재건축이다. 통합재건축은 가구 수가 적거나 개별적으로는 사업성을 맞추기 어려운 노후 단지들이 서로 합쳐 마치 하나의 단지처럼 재건축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200~300가구짜리 소규모 단지 3~4개가 합치면 1,000가구 이상의 대단지가 되고, 이는 건설사의 수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규모가 된다.
통합재건축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규모의 경제 때문만이 아니다. 용적률 인센티브가 결정적 매력이다. 서울시는 통합재건축 사업에 최대 300% 이상의 용적률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이는 개별 단지 재건축 시 적용받는 용적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높은 용적률은 일반분양 세대를 늘려 조합원 부담금(일명 '추가 분담금')을 줄이는 핵심 변수다. 사업성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서울시 85개 구역 로드맵, 실현 가능성은?
서울시가 발표한 85개 신속착공 구역 목록과 3년간 8만5천 가구 공급 계획은 수치만 보면 상당히 공격적이다. 하지만 업계 안팎의 시선은 다소 회의적이다. 먼저 '착공 가능' 단지를 명단에 올린다고 해서 실제 착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착공에는 조합원 총회 의결, 시공사 계약, 금융권 PF 조달, 이주비 확보, 이주 실행 등 여러 단계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막히면 일정이 6개월에서 1년 이상 밀리는 것이 다반사다.
특히 이주비 조달 문제는 현재 가장 뜨거운 현안이다. 이주비 대출은 통상 시공사 연대보증을 조건으로 하는데, 건설경기가 위축되면서 대형 건설사들도 보증 제공을 꺼리는 추세다. 서울시가 이주비 융자 지원 사업을 확대한 것도 바로 이 병목을 뚫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융자 지원 규모가 실수요를 충당하기에는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압구정·성수·여의도 '최대어' 수주 전쟁
대규모 정비사업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압구정·성수·여의도 등 이른바 '빅3' 구역이다. 이들 구역은 수천 가구 규모에 명품 입지를 갖춰 사업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건설사들의 수주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026년 새해 들어 대형 건설사들은 이들 구역 수주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수주 경쟁에 돌입했다.
압구정의 경우 국내 최고가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있는 만큼 재건축 후 분양가가 3.3㎡당 1억 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는 시공사 입장에서도 프리미엄 브랜드 론칭의 기회이자 막대한 공사비를 안정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안전 수주'다. 그러나 조합원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각 구역마다 설계사·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내홍이 반복되고 있어 착공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통합재건축의 법적·실행적 과제
통합재건축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실제 실행에는 상당한 장벽이 있다. 우선 조합원 동의 문제가 가장 크다. 단지마다 아파트 연식·평형·입지 조건이 달라 합산 시 어느 단지가 유리하고 어느 단지가 불리한지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기 쉽다. 이해관계가 다른 두 개 이상의 조합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민 동의율 75% 이상을 확보하는 과정이 보통 개별 재건축보다 훨씬 길고 복잡하다.
법적으로도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은 통합재건축에 대한 명시적 지원 규정이 충분하지 않다. 서울시가 조례 개정이나 특례 도입을 통해 절차를 간소화하지 않는 한, 통합재건축은 실무에서 일반 재건축보다 더 긴 사업 기간을 각오해야 한다. 최근 구로구 온수동 대흥·성원·동진빌라의 통합재건축 사례(최고 44층, 1,453가구)가 본궤도에 오르며 선례를 만들고 있지만, 이를 전국적·전면적으로 확산시키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책 평가: 공급 의지 vs. 구조적 한계
📊 편집팀 정책 평가
서울시의 8만5천호 신속착공 발표는 심리적 신뢰 회복 차원에서 일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급 목표를 수치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정비사업이 실제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공사비 안정화를 위한 건설원가 공개 체계 강화, 이주비 금융 지원 규모의 실질적 확대, 통합재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특례 신설 — 이 세 가지가 세트로 추진될 때 비로소 정책이 현장에서 작동한다. 현재는 목표와 실행 사이 간극이 여전히 크다.
실수요자·투자자를 위한 시사점
✅ 핵심 체크리스트
- 관리처분 인가 이후에도 착공까지 3년 이상 걸리는 구역이 허다하다. 이주비 조달 현황과 시공사 계약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자.
- 통합재건축 추진 단지는 사업성 개선 기대감으로 호가가 오르고 있으나, 조합 동의율과 법적 특례 적용 여부에 따라 사업 무산 리스크도 공존한다.
- 압구정·성수·여의도 등 핵심 구역 입성을 노린다면, 수주전 결과와 일반분양 시기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이 구역들의 분양가 상한 적용 여부가 수익성을 가른다.
- 이주비 융자 지원 확대 정책의 최신 내용을 주기적으로 확인하자. 이주비 이자 부담 경감은 조합원의 사업 참여 의지를 높여 착공 속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 소규모 노후 단지 보유자라면 통합재건축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근 단지 동향을 면밀히 관찰할 것. 통합 추진 시 용적률 인센티브를 통한 사업성 개선이 가장 큰 기회다.
결론: 장기전 각오, 그리고 '선별'의 원칙
서울 정비사업 시장은 지금 양극화가 심화되는 국면이다. 입지가 좋고 사업성이 뚜렷한 일부 구역은 건설사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빠르게 착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반면 사업성이 불분명하거나 조합 내분이 심각한 구역은 서울시의 신속착공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더라도 실제 착공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통합재건축은 분명 유망한 구조적 해법이다. 규모의 경제와 용적률 인센티브라는 두 가지 무기는 그 자체로 강력하다. 하지만 법·제도적 정비가 실물 사업보다 뒤처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통합재건축이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완전히 자리잡기까지는 아직 2~3년의 검증 기간이 필요하다. 투자자에게도, 실수요자에게도, 지금은 '빠름'보다 '정확함'이 중요한 시기다.